부석사는 한국 화엄종의 근본도량 입니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조사가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를 펴던 곳으로,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의 설화는 유명하죠.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창건한 으뜸 사찰이다.
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하고 있을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교학을 펴기 위해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 우리나라 화엄사상의 발원지가 되었다고 합니다.
부석사 범종각
대석축단과 안양루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각은 지반에 견고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이다.
<부석사종각중수기>를 보면 안양루 아래에 승방 만월당 서별실 만세루 범종각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조선 영조 22년(1746년)에 불타서 이듬해 다시 지었다고 한다.
부석사 석등 (국보 17호)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등. 국보 제17호. 높이 297cm. 방형의 지대석 위에 기대받침이 있으며, 기대석의 각 면에는 안상(眼象)이 2구씩 장식되었고 윗면에는 8각의 연화 하대석이 있다. 연화 하대석에는 귀꽃이 뚜렷한 8개의 복련(覆蓮)이 돌아가며 조각되었고 복련 가운데에는 간주석(竿柱石)을 받치는 3단 받침이 있다. 팔각형의 간주석은 가늘고 높은 편이며 상대석에는 보상화 무늬가 장식된 앙련(仰蓮)이 비교적 입체적으로 표현되었다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국보 18호)
부석사 경내에 있는 고려시대 목조건물. 국보 제18호. 1916년 해체·수리할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는 원융국사(964~1053)가 1376년에 중수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연대상 서로 차이가 있어 당시 주지로 있었던 원응국사를 잘못 쓴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의 동쪽 석면에 새겨진 명문에는 충원군의 석공인 김애선(金愛先)이 기단석을 정리했다고 되어 있다.
화강석의 높은 기단 위에 남쪽을 향해 서 있는데 정면 중앙의 3곳에 돌계단을 두었다.
평면구조는 앞면 5칸, 옆면 3칸으로 팔작지붕이며 배흘림(엔타시스)이 뚜렷한 기둥이 받치고 있다.
정면에는 각 칸마다 살창을 달고, 측면은 벽으로 막았으며 뒷벽에는 가운데에 판문(板門)과 그 좌우로 붙박이 살창을 달았다.
공포는 기둥 위에 첨차(?遮)와 살미[山彌]를 층층이 짜올린 주심포(柱心包) 형식으로 되어 있는데 첨차 끝부분이 쌍S자형의 곡선으로 된 것이 특징이다.
건물 내부에는 높은기둥[高柱]을 배열하고 그 사이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위쪽에는 화려한 닫집[唐家]을 만들었다.
이 건물 내부에서 볼 수 있는 헛첨차와 각 첨차 밑면의 연화두형수식 (蓮花頭形修飾), 주두와 소로의 굽면이 곡면이고 굽받침이 있는 점, 솟을대공 등에 고려시대 주심포 양식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선묘각
의상스님이 중국에서 유학할 때 스님을 연모한 “선묘”라는 낭자가 있었다. 의상스님은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 문하에서 10여 년 간의 수학을 마치고 심오한 경지에 이른 후 귀국 뱃길에 오르자, 뒤 늦게 이 소식을 들은 선묘는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벌써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없자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스님이 탄 배를 호위하여 무사히 귀국하였다.
그 후 의상스님이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를 하자 선묘신룡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 올려 물리쳤다고 하여 “부석”이라 불렸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 이중환의 『택리지』기록에 의하면 “아래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뜬 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리하여 절의 이름을 “부석사(浮石寺)”라 불렀으며 그 후 선묘신룡이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石龍)으로 무량수전 앞 뜰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온 몸을 던져 끝까지 그 마음이 변하지 않고 석용이 되어서까지 의상을 사랑한., 선묘낭자 오늘날 세태에 교훈적으로 받아들일만한 사랑 아닐까요
부석사 조사당 (국보 19호)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삼국유사』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또한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 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부석사 돌 계단은 108 개단이다